‘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당신은 신을 믿습니까?’
톰행크스와 이완맥그리거 주연으로 잘 알려진 영화 ‘천사와 악마’는 ‘다빈치코드’로 유명한 작가 댄 브라운의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다. 교황의 부재 속에 교황청 궁무처장은 선택의 결정 앞서 ‘신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유/무신론자을 논하기 전에,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으로 다가서는 질문이다.
학자의 입장이든, 예술가나 종교가의 입장이든 스스로 그 깊이의 차이와 불확실성에 잠시 자신과 마주 앉게 하는 불편한 질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질문은 과학과 지식의 바탕에서나, 혹은 크리스토퍼 히친스와 같은 비판과 평가의 관점들에서 논쟁과 공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과학이 수많은 문들을 지나는 끊임없는 두드림 속에서 인류는 설명할 수 있는 이성적인 논리의 도구를 가지게 될 것이지만, 종교도 역사적으로 불완전한 인류를 보정하는 충분한 자양분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일반인에게 ‘신을 믿습니까?’라는 ‘신의 존재’와 ‘신에 대한 의탁’에 관한 질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문화와 역사적 배경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존재와 의존에 대한 마음을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습관처럼 들락거리며 망각과 기억을 오가곤 한다. 유신론자들과 무신론자들의 다양한 사고와 관점을 듣다 보면, 결국 일반인에게 가까이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문과 가까이 다가서기 위한 보이지 않는 노력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 때문에 유신과 무신의 이분법적 논쟁은 마치 답이 없는 선택의 문제에서 양팔을 잡아당기는 호객의 어리석음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민간신앙이나 토속신앙 그리고 일부 사이비 종교까지도 아직 가까이에 잔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국 어떤 사상과 사고가 현재의 인류와 그 역사 속에 가까이 있는가가 그 시대의 해답이 아닐까 한다. 불완전한 인류는 종교적 믿음과 과학적 이성을 양 발처럼 걸어갈 것이다. 공감된 이성의 시대의 산물들이 신속히 공유되는 시대에서, 종교는 군림하지 않고 진심으로 가까이 보살피고, 탐욕과 범죄의 수단이 아닌 고통을 분담하고 솔선수범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 필요한 덕목이 아닌가 한다.
종교가 인류의 무릎아래에서 함께 머무른다면 이성과 과학을 앞세우는 비판적 무신론자들도 더는 나서지 않을 것이다. 사람을 잡아먹던 시절에도 온 힘을 다해 노력했던 종교가 아닌가?